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남의 과실을 보지 말라

실론섬 2015. 1. 22. 14:34

[담마파다]는 자기를 주인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을 것, 그리고 남을 의지해서는 안됨을 되풀이 하여 강조하고 있다. 특히 모든 일들은 자신 스스로가 원인 제공자이며 그 결과를 받는다는 인과(因果)법을 강조한다. 자신과 타인의 관계 대해 언급한 귀절을 몇가지만 간추려 보겠다.


(158) 먼저 자기를 바른 곳에 놓고 그 다음에 남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현자는 고뇌에 빠지지 않는다.

(159) 만약 남에게 가르치는 대로 스스로 실행한다면 스스로 잘 제어되었기에 남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자기는 제어하기 어렵다.

(252) 남의 과실을 보기 쉽지만 자기 과실은 보기 어렵다. 사람들은 실로 남의 많은 과실은 벼의 껍질처럼 흩뿌리지만 자기 과실은 덮어두어 숨긴다. 마치 교활한 노름꾼이 불리한 골패짝을 숨기는 것처럼

(253) 남의 과실을 따져 항상 투덜대는 사람은 그 번뇌가 커가서 번뇌의 소멸이라는 이상에서는 점점 멀어진다.

(365) 자기가 얻은 바를 대단치 않게 여겨서는 안되고, 남을 부러워하면 안된다. 남을 부러워하는 수행승은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한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늘 남과 접촉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일상생활 자체가 남과의 공동생활에서 성립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자칫하면 자기를 보지 않고 남에게만 눈이 팔리기 쉽다. 남의 과실, 남의 행위, 남의 접근과 망각, 남의 관심과 무관심, 남의 일거수일투족, 그런 것에 우리의 마음은 질질 끌려다닌다. 남을 책망하고, 남에게 성내고, 남을 업신여기고, 남을 원망하고, 남을 시샘하고, 남을 부러워하고, 남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거기서는 자기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주체성은 어디론가 스러져버리고 만다.


붓다께서는 그런 일상생활에서의 나와 남의 관계를 앞에 든 시구를 비롯하여 많은 경전에서 반복해서 경계하셨다. "자기가 주체다, 자기의 하는 일을 주시해라, 자기가 무엇은 하지 않는가를 주목해라, 자기행위와 그 결과를 깊이 반성해라, 먼저 자기를 바로잡아라, 남에게 가르쳤으면 그에 앞서 그대로 실행해라..." 이렇게 붓다는 말씀하셨다.


남에게 눈과 마음이 팔리는 것은 스스로가 주체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야말로 가장 제어하기 힘든 것임에 틀림없다. 자기가 어디로 달려가는가, 자기가 무엇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자기가 언제 무엇을 향해 달려드는가, 자기 속에 충동적인 무엇이 숨어 있어서 그것이 자기를 뒤흔들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자기를 망각하고 사실에 있어서는 스스로 숨겨 놓은 채 자기는 남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거의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까지도 그것을 남이 했다느니 안했다느니 해서 비난하고 소문을 내면서 그것에 열중하여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자기에 대하여 스스로 자문하는 것을 태만히 할 뿐 아니라 모르는 체하고 넘기려 노력한다. 남에 대한 불평에 열을 올린 결과로 자기는 불평의 쓰레기통처럼 되어 버려 정착 가져야 할 자기에 대한 불만 즉 반성이나 참회는 잠재우면서 살고 있다. 이런 남에 대한 관심은 주체성이 없는 사람일수록 심하다.


여기서 말하는 남이란 단순히 자기 눈앞에 있는 특정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남은 우리들의 주위의 어디에든지 있다. 그것은 다수의 사람일수도 있고, 일정하지도 않고, 집단이기도 하고, 사회나 국가인 경우도 있다. 우리들은 무엇이나 정치가 나쁘다느니, 경제의 시스템이 틀렸다느니 하여 모든 책임을 그쪽으로 돌리기 쉽지만 그런 비판에 앞서 그 집단.사회.국가에 자기가 속해 있는 것이니 자기에 부과된 책임부터 느끼고 자각 있는 행위를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은 불교의 가르침은 [담마파다]뿐만 아니라 불교경전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자기, 주체성을 지니고 책임을 지는 자기자신, 자율적인 자기가 서로 접촉하는 곳에만 조화가 이루어진 평화스러운 공동생활이 영위될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