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의 글귀는 Aguttaranikāya(앙굿따라니까야. 增壹阿含經(증일아함경))에 나오는 귀절이다. 붓다는 자신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열렬히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임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붓다는 말을 이어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여러 힘이 있지만 행복의 힘이 최고의 것이다. 어디를 가든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행복의 힘에 의해 불도(佛道)도 달성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입에 담고 있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옛날부터 이에 대해 정의를 시도한 사람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행복이란 심신충족(心身充足)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일시적일 때는 진정한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다. 따라서 진정한 행복이란 그런 심신충족의 상태가 지속적이고 영속적일 때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의 현실은 원래 무상한 것이며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운명을 걸머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최대의 염원인 행복은 언제나 배반되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세상살이의 최대의 비극일 것이다.
대승경전의 열반경은 행복의 최대의 적인 죽음에 대한 문제를 깊이있게 추구해 들어갔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느끼는 가장 큰 의문은 사후에도 생명이 존속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죽은 다음에 어떠한 형태건 생명이 연장되고 존속할 것을 바라고 또한 영원히 생명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죽으면 그만이라는 즉 무(無)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가득차기도 한다.
열반경은 이 두 가지 생각을 전자는 생(生)의 한 변(邊)에 집착하는 것이요, 후자는 사(死)의 한 변에 집착하는 것이라 하여 양쪽이 다 같은 그릇된 생각이라 비판하고, 생과 사는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하나를 취하고 다른 것을 버릴 수 없으며, 포기나 초월은 양자 모두의 포기. 초월(불생불멸. 不生不滅)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만 영원한 것이 있음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성행품(聖行品)에는 '자매공구(姉妹供俱)'라고 불리는 유명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날 부자인 어떤 사람이 절세의 미인을 만났다. 이름을 물었더니 공덕대천(功德大天)라고 하며 재물을 모으고 늘리는 일을 한다는 대답이었다. 주인은 뛸듯이 좋아하며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그 뒤에 또 한 여성을 만났다. 얼굴은 아주 못 생겼고 더러웠다. 이름을 물었더니 흑암(黑闇)이라고 하며 재물을 없애고 소멸시키는 일을 한다는 대답이었다. 부자는 펄쩍 뛰면서 칼을 뽑아 들고 위협하였다.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그러나 그 여인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군요. 앞서 당신이 집안으로 맞이해 들인 사람은 내 언니요. 그리고 나는 늘 언니와 같이 있게 되어 있소. 만약 나를 쫓아 버리고자 하면 내 언니도 같이 쫓아내야 하오."
그래서 부자는 집으로 들어가 공덕대천에게 물었다.
"밖에 웬 여자가 있는 네 동생이라고 하니 그게 사실인가."
"그렇소. 내 동생이오. 나는 그 동생과 언제나 같이 있게 되어 있으며 한시도 떨어지는 일이 없소. 만약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면 내 동생도 함께 좋아해야 하오."
한참을 망설이던 부자는 둘 다 쫓아 버렸다.
"그러면 함께 가 버려라."
이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설화다. 여기서 언니는 생(生)을 비유한 것이요. 동생은 죽음을 비유한 것이니 이 비유담으로 생이 있으면 사가 있으며, 생과 사는 언제나 함께 붙여 다녀서 분리될 수 없음을 밝히고, 나아가서는 생(生)만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세상 사람들의 그릇된 견해를 지적하려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설화는 다시 계속하여 자매가 가난한 집을 찾았더니 그 집의 여인은 두 명을 기쁘게 맞아들였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살 희망을 잃어 버리고 절망의 죽음에 빠져 있는 사람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자매공구의 비유는 생에 집착되는 것이나 사에 집착되는 것이나 다같이 미혹이며, 생사를 함께 버리고 초월하는 곳에 깨달음이 있다는 것, 영원이란 생사 어느 한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를 모두다 초월한 곳에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생사를 구명하고 확실히 깨닫는 것이 곧 진리의 구명이며 진정한 행복의 획득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생사에 대한 많은 설법이 경전에 있다. 그중 법구경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사람이 만약 백년을 산다해도 생과 사를 구명하지 못한다면 하루 살면서 생사를 구명함만 못하다.(113)"
생사를 파악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며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당연히 열반이란 생사를 초월한 곳에서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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