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화엄경

화엄경 - 6. 보살명란품(菩薩明難品)

실론섬 2015. 5. 4. 14:52


문수보살




6. 보살명란품

  

문수보살이 찬탄한 부처님의 광명은 드디어 중생의 청정한 믿음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이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信)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설한 것이 [보살명란품(菩薩明難品)]이다.

 

[명란품]과 [정행품(淨行品)], [현수품(賢首品)]은 모두다 믿음에 대해 설명한 것인데, [명란품]에서는 믿음의 내용에 대해 이해(解)하고, [정행품]에서는 믿음을 실천(行)하고, [현수품]에서는 믿음에 대한 덕(德)을 밝히고 있다.

 

불교경전 가운데 믿음(信)에 대해서 [화엄경] 만큼 강조한 경전도 없다. 그만큼 화엄경은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는 제 8품인 [현수보살품]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명란품(明難品)]이란 이름에서 "란(難)"이란 [화엄경]에서 설하는 10가지의 깊고 깊은 도리를 말하고, '명(明)' 이란 밝힌다는 뜻이므로, 10가지의 깊고 깊은 도리를 밝히는 것이 [명란품]인 것이다. 10가지의 깊고 깊은 도리란 다음과 같다.

 

  1)연기(緣起)의 깊고 깊음 - 각수(覺首)보살이 설함

  2)교화(敎化)의 깊고 깊음 - 재수(財首)보살이 설함

  3)업과(業果)의 깊고 깊음 - 보수(寶首)보살이 설함

  4)설법(說法)의 깊고 깊음 - 덕수(德首)보살이 설함

  5)복전(福田)의 깊고 깊음 - 목수(目首)보살이 설함

  6)정교(正校)의 깊고 깊음 - 진수(進首)보살이 설함

  7)정행(正行)의 깊고 깊음 - 법수(法首)보살이 설함

  8)조도(助道)의 깊고 깊음 - 지수(智首)보살이 설함

  9)일승(一乘)의 깊고 깊음 - 현수(賢首)보살이 설함

 10)불경계(佛境界)의 깊고 깊음 - 문수(文殊)보살이 설함

 

이 10가지의 깊고 깊은 도리를 밝히는 것이 [명란품]의 과제인 것이다.

 

먼저 첫째로 연기의 도리가 깊고 깊음을 설한다. '마음의 성품(心性)은 하나인데 어째서 여러가지 과보가 생기는가?'하는 의문에 대해 각수보살은 모든 법의 실제 그대로의 성품을 설 했다.

 

  예를 들면 저 강의 빠른 물의 흐름은 

  끊임없이 흐르고 흘러서 쉬는 일이 없지만

  그들은 각기 서로 모르는 것처럼 

  저 갖가지 모든 법도 그와 같습니다

 

빠른 물의 흐름은 흘러 흘러서 쉬는 일이 없지만 앞의 흐름과 뒤의 흐름은 서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물은 한순간도 정체함이 없이 흐르고 있지만, 한순간 한순간 생멸(生滅)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의 흐르이란 화엄학적으로 해석하면, '상유(相由'하기 때문에 흐른다고 한다. 뒤의 물이 밀기 때문에 앞의 물이 흐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앞의 물과 뒤의 물이 서로(相) 의지하기(由) 때문에 상유(相由)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물은 바람에 의해 흘러 갈 수도 있고, 바람에 의해 파도를 일으킬 수 있으며, 지면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다. 이 물의 흐름은 마치 마음의 작용이나 변화와 꼭 마찬가지로 흐르고 흘러 가는 것이다.

 

둘째로 교화의 깊고 깊음을 설하는 곳에서는, 부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중생을 교화해가는가 하는 문수보살의 물음에 대하여 재수보살이 답하고 있다.


  온갖 세간의 모든 법들은 

  오직 마음(心)울 주인으로 삼나니 

  즐거움에 따라 그 형상에 집착하면 

  모두 다 뒤바뀐 행동 입니다.

 

일체의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의 변화가 만들어 낸 결과이므로 마음을 그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범부는 유심(唯心)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욕심으로 가득찬 생각을 일으켜 사물의 외형에 집착하지만, 그것은 모두 뒤바뀐 것으로서 실제로는 모든 것이 공(空)이며 소유할 것이 없는 것이다.

 

"온갖 세간의 법들은 오직 마음을 주인으로 삼는다"라는 [명란품]의 이말은 [화엄경]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이다. 또한 유심소조(唯心所造) 즉 모든것은 오직 마음의 작용에 의해 일어난다 (마음이라는 것은 일체 어떤 것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화엄경]의 유심게(唯心揭) 사상은 나중에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로 한다.

 

셋째로 업과의 깊고 깊음을 설하는 곳에서는, 보수보살의 대답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저 대지옥 속에서 중생들은 온갖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오는 곳이 없는 것처럼

  업의 성품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과보로써 대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은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 지은죄의 댓가로써 생긴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업도 그 자체의 자성(自性)은 없지만 반드시 과보(果報)는 존재한다, 과보는 스스로 불러 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넷째로 설법의 깊고 깊음을 설하는 곳에서는, "부처님은 오직 한가지 법을 깨달아셨는데 어떻게 한량없는 음성으로 무량한 법을 말씀하시어, 무수한 중생을 교화할 수 있는가?"하는 문수보살의 질문에 덕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고 있다.

 

  마치 대지는 하나지만 

  갖가지 다른 종류의 싹을 트게 함으로써 

  땅의 성품에 같고 다름이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의 법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대지는 하나지만 그 대지에서 갖가지 다른 식물들의 싹이 튼다. 식물의 싹은 다양하지만 그 싹을 성장시키는 대지는 하나이며, 토지의 성질도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가르침은 하나지만 그것을 설하는 설법은 무량하다. 가르침은 본체(體)고 설법은 작용(用)이므로, 본체는 하나라도 그 작용은 무량한 것이다.

 

가르침을 듣는 중생의 능력은 각각 다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떨어지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갖가지 가르침을 상대의 능력에 맞게 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즉 대기설법(對機說法)이 생겨나는 것이다.

 

다섯째로 복전의 깊고 깊음을 설하는 곳에서는, "부처님의 복전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데 어째서 보시의 과보가 다른가?"라는 문수보살의 질문에 대해 목수 보살이 답하고 있다.

 

  비유하면 깨끗한 저 보름달이 

  네 천하를 다 비추는 것 처럼

  모든 부처님의 거룩한 복전도

  평등하여 조금도 치우침이 없습니다

 

보름달이 모든 세계를 비추듯이 부처님의 복전도 일체의 중생에게 차별없이 평등하여 치우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것에 평등하여 미워함도 친함도 없다고 한다. 소위 미워함도 친함도 없는 평등한 부처님의 대자비를 말하는 것이다.

 

여섯째로 정교의 깊고 깊음을 설하는 곳에서는, 진수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중생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설한다.

 

  만일 한량없는 허물을 끊어 없애려고 한다면

  언제나 끊임없이 용맹하게 정진해 나가야만 합니다

  비유하면 나무를 비벼서 불을 일으킬 때 불이 일기도 전에 자주 쉰다면

  불기운도 그에 따라서 없어지는 것처럼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번뇌를 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다.

 

일곱번째 정행의 깊고 깊음을 설하는 곳에서는, 법수보살이 정법대로 듣기만 할 뿐 실행하지 않으면 번뇌를 끊을 수 없다고 설하고 있다. 즉 많이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물에 표류하는 사람이 빠질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목이 말라 죽는 것 처럼

  많이 듣기만 하고 말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비유하면 빈궁한 사람이 밤낮으로 남의 보물을 헤아리면서

  자기의 몫은 반푼도 없는 것처럼

  많이 듣기만 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비유하면 훌륭한 의사가 온갖 처방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많이 듣기만 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다만 가르침을 듣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으며 오직 가르침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즉 실천행이 없는 것은 불법이란 보물을 세기만 할뿐 실제로는 전혀 불법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여덟째로 조도의 깊고 깊음을 설하는 곳에서는, 부처니은 왜 중생을 위해 6바라밀이나 자(慈).비(悲).희(喜).사(捨)의 4무량심(四無量心)을 설하는가?라는 문수보살의 질문에 대해서, 지수(智首)보살은 중생의 능력에 맞는 가르침을 설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인색한 이에게는 보시를 찬탄하고

  파계한 이에게는 지계(持戒)를 찬탄하며

  성 잘내는 이에게는 인욕(忍辱)을 찬탄하고

  게으른 이에게는 정진을 찬탄하네

  마음이 산란한 이에게는 선정을 찬탄하고

  어리석은 이에게는 지혜를 찬탄하며

  어질지 못한 이에게는 자민(慈愍)을 찬탄하고

  남을 헤치는 이에게는 대비를 찬탄하네

 

라고 한다. 6바라밀이나 4무량심을 설하는 것은 중생 개개인의 결점을 하나씩 바로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아홉번째로 일승의 깊고 깊음을 설하는 곳에서는, 현수보살이 오직 한 법(一法)의 중요성을 밝힌다.

 

  문수여, 법이란 항상 그러하여 법왕(法王)은 오직 한 법 뿐 입니다.

  모든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오직 하나의 길(道)로 생사를 벗어 납니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몸은 오직 하나의 법신(法身)으로서 

  마음도 하나 지혜도 하나이며

  힘이 무외함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몸은 하나의 법신, 하나의 마음, 하나의 지혜로서 근본적으로 하나의 법인 것이다. 중생의 능력이나 수행에 따라서 여러가지 불국토를 볼 수 있다. 때로는 부처님의 수명을, 때로는 부처님의 광명을, 때로는 부처님의 신통력을, 때로는 부처님의 법회를 볼 수 있지만, 그것들의 근본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법신이며 하나의 법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단어인 무애(無碍)라는 말이 나온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애자재한 삶이란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속박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 무애자재(無碍自在)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 들리는 것, 깨달아지는 것, 인식되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그것에서 부터 벗어나고 풀려나 무애자재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

 

즉 하늘을 나는 새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은 경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지가 곧 깨달음을 이룬 선사(禪師)들의 삶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사는 곧 속박이다. 그러나 무애한 사람은 일체의 모든 일에 속박되는 일이 없다. 무애하게 살아가는 것이 곧 불교적인 깨달음의 삶이다.

 

자재무애(自在無碍)라는 말이 있다. 무애한 사람은 하나의 법(一法.一道)에 의해 생사를 벗어나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이 사는 것이다. 생사는 속박이다. 그러나 무애한 사람은 일체의 모든 구속에 속박되는 일이 없다. 무애하게 살아가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모든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즉 무애한 사람이란 이 뜻을 가장 잘 나타낸 사람이 원효대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원효는 [화엄경]의 무애자재한 사상을 대단히 좋아 했으며, 출가해서 계율을 지키는 생활이나 환속하여 재가의 생활을 하는 것이나 모두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열번째로 불경계의 깊고 깊음을 설하는 곳에서는,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경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한다.

 

  부처님의 깊은 경계는 그 분량이 허공과 같아서

  일체의 모든 중생이 들어가도 진실로 들어 간곳이 없습니다

 

새들이 날아도 흔적이 남지 않는 곳이 허공이다. 이것과 똑같은 것이 부처님의 경계이다. 부처님의 경계는 오직 부처님만이 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경계의 인(因)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무량겁을 설명해도 다하지 못하네

 

라고 한다. 부처님의 경계를 중생은 설명하여 밝힐 수 없지만 부처님은 중생 속에 파고 들어와 여러가지 설법을 한다.

 

  중생들에게 수순(隨順)하기 때문에 모든 세계에 두루 들어가지만

  지혜는 항상 고요하여 이 세상에서 보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중생의 능력에 맞게 설법한다. 또한 부처님은 어떠한 세계에도 들어 갈 수 있다. 지옥에도 축생에도 부처님은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어떠한 세계에 들어 가더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항상 고요하여 이 세상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며, 아무리 더러운 곳에 들어가더라도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의 경계는 청정해서 아무리 더렵혀도 더럽혀지지 않으며,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다.


원효는 이 부처님의 경계를 설한 [화엄경]처럼 '무애자재'하게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경계를 깨달아 부처님의 경계에 살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비원(悲願)으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