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화엄경

화엄경 - 15. 불승야마천궁자재품, 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

실론섬 2015. 5. 4. 19:41


비로자나부처님



15. 불승야마천궁자재품

 

불승야마천궁자재품(佛昇夜摩天宮自在品)부터 제4 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에 들어간다. 이 제4회에서는 4개의 품을 설한다. 여기서 야마천궁회란 부처님이 야마천궁이라고 하는 천상의 궁전에 올라가 설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승야마천궁자재품]은 그 가운데서 부처님을 야마천궁의 궁전으로 청하는 서문에 해당된다.

 

부처님이 야마천궁의 사자좌에 앉으시자 지금까지 울려 퍼지던 음악이 그치고 정적이 찾아 왔다. 그러자 야마천왕夜摩天王) 이 옛날 과거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선근을 심었던 것을 회상하면서 게송을 읊었다. 그것은 "여러가지 길상(吉祥)중에서 최상"이라고 하는 열분의 부처님이 어떤 길상한 궁전에 들어 가셨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열분의 부처님과 들어가신 궁전은 다음과 같다.

 

  명칭(名稱)여래 - 마니보배로 장엄한 궁전

  보왕(寶王)여래 - 감로 가운데 가장 맛있는 궁전

  희왕(喜王)여래 - 온갖 보배로 장엄한 궁전

  혜안(慧眼)여래 - 특수하고 훌륭한 궁전

  요익(饒益)여래 - 청정한 보배산의 궁전

  무사(無師)여래 - 미묘한 보배향의 궁전

  천인중존(天人中尊) - 가볍고도 미묘한 향의 궁전

  무거(無去)여래 - 밝고 깨끗하며 두루 보는 눈의 궁전

  분별(分別)여래 - 즐겁고 장엄한 궁전

  고행(苦行)여래 - 평등한 빛이 두루 비치는 궁전

 

이들 열 분의 여래는 세간의 등불이며, 지혜가 무량하고 세간에서 가장 높으며, 위없는 스승으로서, 각각 최고의 길상한 궁전에 드신 것이다. 이와같이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는 야마천왕의 게송이 끝나자 부처님은 야마천궁의 사자좌에 올라 결가부좌하고 앉으셨다.

 

야마천왕이 열분의 부처님은 길상 가운데 최고로 높으신 분들이며, 그들이 계신 궁전도 최고로 길상한 곳이라고 하는 회상을 하였지만, 지금 부처님이 계신 궁전은 그 이상으로 길상 가운데 더없이 길상한 곳이라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더할 수 없이 길상한 궁전에서 제4회의 설법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 [불승야마천궁자재품]의 내용인 것이다.

 

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設偈品)

 

야마천궁에 결가부좌하고 앉으신 부처님의 주위에는 여러 세계로 부터 열 분의 부처님과 열 분의 보살이 모여들어 각각 결가부좌하고 앉았다. 그 열 분의 부처님 이름에는 상주안(常住眼). 무량안(無量眼)등과 같이 모두 '안(眼)'자가 붙어 있으며, 열분의 보살 이름에는 공덕림(功德林). 혜림(慧林)등과 같이 모두 '림(林)'자가 붙어 있다. 보살의 이름에 '림'자가 붙은 이유는 법계의 수행을 행하고 법계의 덕을 완성하는 것을 나타내어 그 덕이 높고 넓음을  나무에 비유하여 '림'이라고 한 것이다.

 

이들 열분의 보살은 게송으로써 각각 부처님을 찬송 하였는데, 그 가운데 공덕림 보살이 읊은 게송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체의 모든 세간 사람들은

  아무도 부처님을 헤아릴 수 없지만

  부처님은 중생의 원에 따라

  모든 곳에 나타내 보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부처님을 생각할 수도 볼 수도 없지만 오로지 중생이 서원하면 볼 수 있는 것이다. 야마천궁의 사자좌에 앉으신 부처님이나 열 분의 여래, 이 법회에 모인 무수한 보살들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강렬한 서원이 없으면 볼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혜림보살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불가사의한  오랜 겁을 지나도

  천인사(天人師)를 만나기 어렵나니

  번뇌를 떠난 모든 대장부들의 이런 모임도

  또한 만나기 어려워라

 

여기서 천인사란 부처님을 말하며, 번뇌를 떠난 모든 대장부란 열 분의 여래를 말한다. 무한한 시간에 걸쳐서도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과 열 분의 여래를 이 야마천궁의 법회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혜림보살은 감격하여 칭송한 것이다.   아홉번째의 여래림(如來林)보살은 유명한 "유심게(唯心偈)"를 설한다.

 

  마음은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갖가지 오음(五陰)을 그려내나니

  그러므로 이 세계 가운데서 무엇이고 짓지 못하는 법이 없습니다

  마음와 같이 부처님도 그러하며 부처님과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꼭 같아서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마음따라 변하는 줄을 모든 부처님은 잘 아십니다.

  만일 누가 이렇게 이해 한다면

  그사람은 참다운 부처를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은 능숙한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무엇이든 만들어 낸다. 이것은 "유심소조(唯心所造)"라고 한다. 어리석음으로 헤매는 범부의 마음도, 깨달은 부처의 마음도 모두다 마음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고 한다. 우리들의 마음이 헤매면 중생이 되고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중생도 부처도 우리들 마음의 작용에 의한다. 부처라고 해도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마음과 부처는 구별이 없으며, 또한 마음이 헤매어 범부가 될 때 마음과 범부도 구별이 없는 것이다.

 

"유심소조"라는 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된다. 무덤가에서 하루밤을 지내면서 겪었던 일에서 원효는 "유심소조"라는 의미를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 오게 된다. 다시 말해서 유심소조란 마음가짐 하나로 세계가 변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세계를 마음이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세계는 바뀐다는 것이 유심소조의 참뜻이다.

 

이렇게 보면 마음이라는 것이 일체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일체의 것을 만든다. 부처님이란 보통 일체의 것을 만들지 않으며 깨끗한 세계에 있다고 생각 하지만 그렇지 않다. 부처님 또한 극악의 중생에게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깨끗한 세계에 있어서는 안되므로 고민하고 있는 중생의 마음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리들 중생도 미혹의 세계만이 아니고 문득 눈을 뜨면 깨달음의 세계를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마음은 모든 세계를 만들고 있다.

 

부처님도 모든 세계를 만들어 가신다. 중생도 모든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도 부처도 중생도 모두 같은 것이 된다. 마음과 중생과 부처님이 같다는 말중에서 마음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생각 한다면 부처님과 중생이 같다고 하는 것은 불교도 입장에서는 큰 문제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것은 물과 얼음과 같은 것과 같다. 물을 떠나 얼음이 있을 수 없듯이 중생을 떠나 부처님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이것은 우리 중생이 육도를 윤회하며 미혹에 빠져 있어도 일단 발심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중생의 원심(願心)에 감응하여 중생 속에 들어가 구제해 주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존귀한 분이고 중생은 어디까지나 틀렸다고 한다면 불교에서 특히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생구제란 있을 수 없다. 부처님과 중생이 같다는 말속의 의미는 깊은 종교적인 생명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삼계(욕계.색계.무색계)를 말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세계는 허망하다. 환상이고 무상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세계는 모두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유심게"에 이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일 누구나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 싶으면

  마음이 모든 부처님을 만든다고

  그렇게 관찰해야만 합니다.

 

이 게송은 80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의 부처님을 알려 하거든

  마땅히 법계의 성품과 일체의 모든것이

  오직 마음으로 된 것임을 관(觀)해야 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유심게"의 처음에 "마음은 능숙한 화가와 같다"라고 하여 마음을 능숙한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에 비유하고 있는 데, 이러한 비유는 [잡아함경 10]에도 있다.

 

  긴 밤에 갖가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든다.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중생이 괴롭고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중생도 깨끗하다

  예를 들면 화가가 하얀 종이위에 여러가지 색깔로

  마음대로 갖가지 그리을 그리는 것과 같다.

 

화가가 잘 펴 놓은 종이위에 여러가지 색깔로 자기 마음대로 온갖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화가는 어떠한 형태라도 마음대로 묘사한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중생의 마음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의 여러가지 번뇌로 물들어 있어 갖가지 색채를 띠고 있다. 여기서의 마음이 괴롭다 하는 것이 [화엄경]의 "유심게"의 중생이 되고, 마음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이 부처가 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괴로워하면 중생이고 마음이 깨끗해 지면 부처가 되므로, 마음과 중생과 부처가 전혀 다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야마천궁보살설게품]의 마지막은 지림보살(智林菩薩) 의 게송으로 끝난다.

 

  비록 부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더라도

  그 음성은 부처님이 아니네

  그 음성을 떠나도 또한 부처님의 등정각(等正覺)을 알수 없습니다

  이 이치는 매우 깊고도 미묘 합니다

  만일 이것을 잘 분별해 알면 위없는 저 도(道)를 장엄해 일체의 허망함을 멀리 떠납니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부처님 법을 말하는 일이 없지만

  중생의 부름에 따라 변신해서 그들을 위해 법을 설 하십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능력에 맞게 법을 설한다. "중생의 부름에 따라 변신하여"라고 하는 것처럼 중생의 서원에 따라 부처님은 나타나서 교화하고 설법하는 것이다. 구하는 마음, 서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부처님과 보살은 결코 목소리를 내거나 그 모습을 눈앞에 나타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