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화엄경

화엄경 - 25. 심왕보살문아승지품

실론섬 2015. 5. 5. 13:46



25. 심왕보살문아승지품

 

유한의 세계와 유한의 인생을 살아가는 중생들에게는 무한의 수(數)라든가 무한의 생명이라고 하면 관념적으로는 막연히 알 수 있을 것같지만 실제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무한의 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심왕보살문아승지품(心王菩薩問阿僧祗品)]이다.

 

이것은 바로 [화엄경]의 세계라고 이해하면 된다. 화엄경의 세계관이 어떠한지를 이 품에서는 밝히고 있는 것이다. 심왕보살이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이른바 아승지(阿僧祗).불가량(不可量).무분제(無分齊).무주변(無周邊).

  불가수(不可數).  불가칭량(不可稱量).불가사의(不可思議).불가설(不可說).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아승지 내지 불가설불가설이라 합니까?

 

라고 질문하자, 부처님은 무한의 큰 수에 관해 설명을 한다. 여기서 굳이 화엄경의 수론(數論)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인간의 두뇌로는 헤아릴 수 도 생각 할수도 없으므로 불가설(不可說)이라 하는데, 그것을 더 한층 초월한 무한수, 극대수를 화엄경에서는 설하고 있다.

 

자연수에 1씩을 더해 가면 무한히 큰 수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데, 이 무한수가 하나의 미세한 티끌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 [아승지품(阿僧祗品]이다. 예를 들면,

 

  일념(一念)중에 불가설의 모든 세계를 설하고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모든 겁 동안에

  일념 일념 차례로 연설 합니다

 

일념 가운데 무한의 세계를 설하고, 무한의 시간 가운데 일념(一念) 일념을 설한다. 한순간이 곧 무한이고 무한이 곧 한순간이라는 시간론을 설하는 것이다. 한 순간 가운데 무한을 보고, 무한 가운데 한순간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일즉다(一卽多)와 그 반대인 다즉인(多卽一)이라는 말로 함축 할 수 있다. 즉 이를 시간적으로 설명하면 하나가 전체이고(미세한 것 중에 무한의 세계가 들어가고)그 반대로 전체가 하나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공간적으로 설명하면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미세한 티끌속에 불가설의 모든 중생이 있다"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속에 무수한 중생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는 모든 것은 부처님의 한 털구멍(毛孔)속에 넣어도 넉넉하다는 것이다. 미세한 모공속에 모든 불국토가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경전에서는 보리(菩리)를 구하는 마음을 발한다면, 미세한 세계가 곧 큰 세계이며 큰 세계가 곧 미세한 세계임을 알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소세계가 대세계이며 대세계가 소세계이고 광대한 세계는 협소한 세계이며 오염된 세계도 깨끗한 세계이며 깨끗한 세계도 오염된 세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처음 듣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없거나 또는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것들은 범부 중생의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고 이해도 안된다. 또한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이고 우리들 쪽에서 본다면 작은 한 먼지는 어디까지나 먼지이고 커다란 세계는 어디까지나 커란 세계일 뿐이다. 따라서 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즉다를 시간적으로 보면 일념 즉 한순간의 생각 그 속에 미래와 과거가 모두 들어가 버린다. 부처님 눈으로 보면 이 한순간 속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조명되어 온다. 이것 또한 우리들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 눈이 아니면 안 보인다. 그럼 부처님 입장이라는 것은 어떤 입장인가? 그것을 [화엄경]에서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말로 나타낸다. 이것은 절대무(絶對無)의 세계다. 절대무의 세계에서는 그것은 비칠 수 밖에 없다. 왜 비칠수 밖에 없느냐 하면 절대무의 세계는 마치 거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반영하지만 거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거울 자체는 어디까지나 청정하다.

 

일체의 아집이 없어진 상태, 자기의 견해가 없어진 삼매가 곧 해인삼매이다. 자기 눈으로 사물을 보는 일이 없어진 모습이기 때문에 거울과 같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비춰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순간의 생각속에 과거도 미래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맑은 곳에 비춰지는 것이다.

 

일즉다(一卽多)를 공간적으로 설명해 보자. 이를테면 숫자를 생각해 보자. 여기에 1.2.3.4.5 라는 숫자가 있다고 하자. 그 1이라는 숫자를 생각할 경우 우리는 2.3.4.5.... 이라는 수를 예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 안에는 2에서 무한대수까지 들어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2.3.4.5.6 이렇게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하나에 모든 수가 여기에 들어 온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좀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책상을 생각해 보자. 책상에는 다리가 4개가 있다. 그렇지만 다리 하나가 없으면 쓰러지게 된다. 그러니까 이 한개는 다른 3개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A 각안에는 B,C,D 각이 없으면 안된다. B 각 안에는 A,C,D 각이 없으면 안된다. C각 안에는 A,B,D 각이 없으면 안된다. 어느 하나를 빼 버려도 이것은 안된다. 이런 상호의존성을 공간적으로 일즉다로 표현한 것이다.


경전에서는 하나의 신체에서 무수한 광명을 발하고, 하나의 광명에서 무수한 보련화(寶蓮華)를 꽃 피우며, 하나의 달에서 무수한 달을 낸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광명을 중시하고 있다.

 

  불가언설전(不可言說轉) 을 섭취하여 광명을 발하는 것은 불가설 입니다

  그 하나 하나의 광명속에서 모든 부처님을 출현시키는 것도 불가설 입니다

 

그리고 다시 경전은

 

  한 오라기 털끝에 무량한 국토가 있지만 그 속에서 서로 부딪히지 않으며

  미세한 털끝 또한 크지 않지만 

  넓은 불국토를 모두 포함해도  

  불국토는 잡란하지 않고

  형상은 본래와 같이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의 털끝에 무량한 국토가 들어 있지만 서로 근접해서 부딛히는 일이 없다. 또한 작은 털끝에 광대한 불국토를 포함하고 있지만 모든 불국토는 정연히 그 가운데 위치하여 결코 어지럽지 않으며, 불국토의 형태도 전혀 어그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광명으로 비추어 드러나,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여기에 묘사된 것과 같은 상황이 눈 앞에 전개 된다는 것이다.

 

무한의 수를 설하는 [아승지품(阿僧祗品) ]의 아승지(阿僧祗) 란 무수(無數)라는 의미로, 수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다. 법장은 탐현기(探玄記)에서 다섯 종류의 수법(數法)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제1은 사람의 수법으로써, 가장 낮은 것이라 한다.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수를 의미한다.

 

제2는 제천(諸天)의 수법으로써, 사람보다도 뛰어난 수를 헤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재천왕(自在天王)은 일념 가운데 대천(大千)의 빗방울을 알 수 있다.

 

제3은 사리불은 사람과 제천을 초월한 수법을 알수 있다.

 

제4는 보살의 수법이다. 보살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예를 들면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지식인 석천주(釋天主)동자는 모래알을 셀 수 있으며,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은 찰진(刹塵), 즉 무수한 불국토의 수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보살의 수법은 사람이나 제천등과 같은 하위의 존재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제5는 부처님의 수법으로서, 부처님은 아는 것이 자유자재 하여 무극(無極)의 수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무한의 수를 설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갠지스강의 모래 수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법장은 용수의 대지도론(大智度論)의 한 문장을 인용한다. [대지도론]에서는 "일체의 산수(算數)로 알지 못하는 바를 오직 부처와 법신(法身)보살만이 그 수를 안다"라고 한 뒤 다음의 설화를 들고 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기원정사 동산의 숲의 나무 아래 낮아 계셨다. 한 바라문이 부처님께 와서, 

"이 숲에는 몇 개의 나뭇잎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약간의 나뭇잎이 있다"고 

대답했다. 바라문은 부처님의 대답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하여 은밀히 나뭇잎 몇개를 따서 버리고는 다시 부처님께 이 숲의 나뭇잎 수를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 지금은 약간의 나뭇잎이 전보다 적어졌다"고 대답했다. 바라문은 부처님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경탄하면서 부처님을 존경하여 출가를 했다고 한다. 즉 부처님이 무수한 수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법장 스님의 설명으로 부처나 보살은 무한대의 수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다. 무한수는 오직 불지(佛智)만이 알 수 있으며, [아승지품]에서 설하는 무한수는 부처나 보살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