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맛지마 니까야

MN 107. 가나까 목갈라나 경(gaṇakamoggallānasuttaṃ)

실론섬 2016. 5. 25. 12:29

MN 107. 가나까 목갈라나 경(gaṇakamoggallānasuttaṃ)

 

7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에 있는 동쪽 숲에 있는 미가라마뚜 강당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가나까목갈라나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아서 가나까 목갈라나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예를 들면, 고따마 존자여, 여기 미가라마뚜 강당을 짓는 데도 계단의 마지막 부분까지 짓기 위한 점진적인 기초, 점진적인 공사, 점진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참으로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에게도 베다 공부를 위한 점진적인 공부, 점진적인 행함, 점진적인 실천이 있습니다. 참으로 고따마 존자여, 궁수들에게도 활쏘기를 위한 점진적인 공부, 점진적인 행함, 점진적인 실천이 있습니다. 참으로 고따마 존자여, 우리 회계사들에게도 계산(회계)를 위한 점진적인 공부, 점진적인 행함, 점진적인 실천이 있습니다. 참으로 고따마 존자여, 우리는 제자를 받아들이면 첫 번째로 '1은 하나로 된 것, 2는 둘로 된 것, 3은 셋으로 된 것, 4는 넷으로 된 것, 5는 다섯으로 된 것, 6은 여섯으로 된 것, 7은 일곱으로 된 것, 8은 여덟으로 된 것, 9는 아홉으로 된 것, 10은 열로 된 것'이라고 헤아리게 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우리는 100도 헤아리게 하고, 더 많은 것도 헤아리게 합니다. 참으로 고따마 존자여, 이 법과 율에서도 이렇게 점진적인 공부, 점진적인 행함, 점진적인 실천을(닦음을) 선언할 수 있습니까?"  

 

75. "바라문이여, 이 법과 율에서도 점진적인 공부, 점진적인 행함, 점진적인 실천(닦음)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능숙한 말 조련사는 건강하고 좋은 혈통을 가진 말을 얻은 뒤에 첫 번째로 굴레를 채우고 훈련시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간 훈련을 시킵니다. 이처럼, 바라문이여, 여래는 길들여야 할 사람을 얻은 뒤에 첫 번째로 이렇게 길들입니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계를 중시하여라. 빠띠목카(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는 자, 바른 행실과 행동의 영역을 갖춘 자,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는 자로 머물러라. 학습계목들 위에서 받아 지닌 채 닦아라.'라고.

 

바라문이여, 비구가 계를 중시하고, 빠띠목카의 단속으로 잘 단속하는 자, 바른 행실과 행동의 영역을 갖춘 자,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는 자로 머물고, 학습계목들 위에서 받아 지닌 채 닦을 때 여래는 그를 더 나아간 것으로 길들입니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감각기능의 문을 잘 보호하라. 눈으로 형색을 보면서 그 표상[相]을 붙잡지 말고, 뒤따르는 세세한 부분상[受細相]을 붙잡지도 마라. 만약 그대의 눈의 감각기능[眼根]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간탐과 고뇌) 삿되고 선하지 않은 형상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대는 눈의 감각기능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도록 하라.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 혀로 맛을 맛보면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마음으로 로 법(마음현상)을 인식하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도 말고, 뒤따르는 세세한 부분상을 붙잡지도 마라. 만약 그대의 마음의 감각기능[意根]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대는 마음의 감각기능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도록 하여라.'라고.

 

바라문이여, 비구가 감각기능의 문을 잘 보호할 때 여래는 그를 더 나아간 것으로 길들입니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음식에 대한 적당량을 알아라. 그대는 지혜롭게 숙고하면서 음식을 수용하라. 그것은 맛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고, 배부르게 먹기 위함도 아니고, 몸을 살찌우기 위함도 아니고, 보기 좋게 가꾸고자함도 아니고, 다만 건강을 해치지 않고, 이 몸을 유지하여 청정수행을 돕기 위함이다. 바른 관찰로써 배고픔의 오래된 느낌을 제거하고 배부름의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의 삶은 흠 잡을 데 없고(비난받을 일이 없이), 안락한 생활양식이 유지될 것이다(안락하게 머물 것이다).’라고.   

바라문이여, 그 비구가 음식에 대한 적당량을 알 때 여래는 그를 더 나아간 것으로 길들입니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깨어있음을 실천하며(전념하며) 머물러라. 낮 동안에는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밤의 초경에도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한밤중에는 발에 발을 포개고, 마음챙기고 알아 차리면서[正念 ‧ 正知] 일어날 시간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오른쪽으로 사자처럼 누워야 한다. 밤의 삼경에는 일어나서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라고.  

 

바라문이여, 비구가 깨어있음을 실천하며 머물 때 여래는 그를 더 나아간 것으로 길들입니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갖추어라. 나아갈 때에도 돌아올 때에도 [그대의 거동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正知] 행하고, 앞을 볼 때에도 돌아볼 때에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하고, 구부릴 때에도 펼 때에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행하고,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에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하고, 먹을 때에도 마실 때에도 씹을 때에도 맛볼 때에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하고, 대소변을 볼 때에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행하고, 갈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앉아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깨어있을 때에도 말할 때에도 침묵할 때에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행해야 한다.'라고. 

 

바라문이여, 비구가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갖출 때 여래는 그를 더 나아간 것으로 길들입니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하라.'라고. 그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합니다. 그는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똑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간탐을 제거하여 간탐을 버린 마음으로 머물고, 간탐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분노의 오점을 제거하여 분노가 없는 마음으로 머물고,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며 머물고, 분노의 오점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해태와 혼침없이 머물고, 광명상을 가져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 ‧ 正知]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물고,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의심을 제거하여 의심을 극복하여 의심을 건너 유익한 법들(선한 법들)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 없는 자로 머물고,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76. 그는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이들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여,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해로운 법들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 고찰.伺)를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기쁨을 떠나 평정(평온)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 ‧ 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느끼는,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정과 마음지킴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라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줄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지킴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이런 이것이, 바라문이여, 마음으로 아직 목적을 성취하진 못했지만 위없는 유가안온(瑜伽安穩)을 원하면서 머무는, 유학(有學)인 비구들에 대한 나의 이런 가르침의 근본이 있습니다(이런 간곡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윤회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올바른 궁극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들에게 이 법들은 지금‧여기에서 행복한 머묾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으로 이끕니다."라고.

 

*번뇌 다한 자들이 항상 예리한 마음챙김과 큰 지혜가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어떻게 앞에서 말씀하신 이런 법들이 그 번뇌 다한 자들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하시는 거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두 부류의 번뇌 다한 자들(khinasava)가 있으니, 지속적으로 증득에 들어 있는 자(satata-vihari)와 그렇지 않은 자이다. 지속적으로 증득에 들어있는 자는 어떤 일을 하고나서도 과의 증득(phala-samapatti)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는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appamattake pi kicce) 그 일을 하고 나면 과의 증득에 들 수가 없다. 이것이 그 일례이다. 
번뇌 다한 어떤 장로가 번뇌 다한 사미를 데리고 숲 속 거처로 갔는데, 큰 장로는 거처를 얻었지만 사미는 얻지 못했다. 사미가 거처를 얻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서 장로는 단 하루도 과의 증득에 머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미는 석 달 동안 과의 증득에 머문 뒤 장로에게 와서 숲 속에 거주하는 것이 유익했는지 물었다. 장로는 유익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이와 같은 번뇌 다한 자는 이 가르침들에 대해 처음부터 전향한 다음(avajjitva) 증득에 들 수 있다. 그래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는데 도움이 된다(sati-sampajannaya ca).'고 하신 것이다."(MA.iv.70)  

 

이렇게 말씀하시자 가나까목갈라나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의 이런 지도(훈계)와 이런 이어지는 가르침을 받은 고따마 존자의 제자들은 모두 궁극의 완성인 열반을 얻습니까, 아니면 어떤 자들은 얻지 못합니까?"

"바라문이여, 이런 지도와 이런 이어지는 가르침을 받은 나의 제자들은 어떤 자들은 궁극의 완성인 열반을 얻고 어떤 자들은 얻지 못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열반이 있고 열반으로 인도하는 길도 있고 이끄는 자인 고따마 존자도 있는데 무슨 원인, 무슨 조건 때문에 고따마 존자의 이런 지도와 이런 이어지는 가르침을 받은 고따마 존자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궁극의 완성인 열반을 얻고 어떤 자들은 얻지 못합니까?" 

 

77.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이것을 되묻겠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설명하십시오. 바라문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라자가하로 가는 길에 익숙합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시여, 저는 라자가하로 가는 길에 익숙합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바라문이여? 여기 라자가하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올 것입니다. 그는 그대에게 와서 '존자시여, 저는 라자가하로 가고자 합니다. 라자가하로 가는 길을 알려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여보시게, 오시오. 이 길이 라자가하로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따라 가면 어떤 마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가십시오. 그 길을 따라 조금 가면 라자가하의 아름다운 공원과 아름다운 숲과 아름다운 들판과 아름다운 호수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그는 그대에게 이렇게 지도를 받고 이렇게 가르침을 받았지만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서쪽을 향해서(반대편을 향해서) 갈 것입니다. 그리고 라자가하로 가고자 하는 두 번째의 사람이 올 것입니다. 그는 그대에게 와서 '존자시여, 저는 라자가하로 가고자 합니다. 라자가하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그에게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여, 오시오, 이 길이 라자가하로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따라 가면 어떤 마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가십시오. 그 길을 따라 조금 가면 라자가하의 아름다운 공원과 아름다운 숲과 아름다운 들판과 아름다운 호수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그대에게 이렇게 지도를 받고 이렇게 가르침을 받은 그는 안전하게 라자가하에 갈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라자가하가 있고 라자가하로 가는 길도 있고 이끄는 자인 그대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그대에게 이렇게 지도받고 이렇게 가르침을 받은 자 가운데 한 사람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서쪽을 향해서 가고, 한 사람은 안전하게 라자가하에 가게 됩니까?" 
"고따마 존자시여, 여기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길을 안내하는(가리키는) 자입니다." 

 

"이처럼, 바라문이여, 열반이 있고 열반으로 인도하는 길도 있고, 이끄는 자인 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 의해 이런 지도와 이런 이어지는 가르침을 받은 나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궁극의 완성인 열반을 얻고 어떤 자들은 얻지 못합니다. 바라문이여,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길을 안내하는 자입니다." 

 

78. 이렇게 말씀하시자 가나까목갈라나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믿음이 아니라 생계를 목적으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교활하고 사기치고 산만하고 거친 말을 말합니다(함부로 말합니다). 그들은 감각기능의 문을 잘 보호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적당한 양을 모르고, 깨어있음을 닦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문의 결실에는 관심이 없고(사문에 대한 추구가 없고), 닦음을 존중하지 않으며(공부의 꿰뚫음을 존중하지 않고), 사치하고, 게으르며, 퇴보에 앞장서고, 홀로 머묾을 멀리 버리고,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분명히 알아차림[正知]이 없고, 삼매를 닦지 못해서 산란한 마음 때문에 지혜가 없고 귀머거리와 벙어리와(멍청이) 같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속이지 않고 교활하지 않고 사기 치지 않고 산만하지 않고 거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각기능의 문을 잘 보호하고, 음식에 대해 적당한 양을 알고, 깨어있음을 닦습니다. 그들은 사문의 결실을 기대하고, 닦음을 존중하며, 사치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퇴보에 앞장서지 않으며, 홀로 머묾을 멀리 버리지 않고,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삼매를 닦아서 집중된 마음 때문에 지혜가 있고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아닙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뭅니다.

 

예를 들면, 고따마 존자시여, 뿌리의 향기들은 어떤 것이든 안식향이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불립니다. 예를 들면 고따마 존자시여, 속재목의 향기들은 어떤 것이든 붉은 전단향이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불립니다. 예를 들면, 고따마 존자시여, 꽃의 향기들은 어떤 것이든 재스민 꽃이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불립니다. 이처럼 고따마 존자의 가르침은 지금의 법들 가운데서 으뜸입니다.

 

''지금의 법들'이란 그때 당시 있었던 육사외도의 가르침들을 말한다. 그런 가르침들 가운데 사문의 가르침이 최상(parama)이요 으뜸(uttama)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다."(MA.iv.70)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진리)을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합니다. 또한 저는 이제 그 가르침(법)에 귀의합니다. 또한 저는 이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 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가나까 목갈라나 경(M107)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