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공안집 II

633칙 임제편할 臨濟便喝

실론섬 2026. 4. 21. 15:56

633칙 임제편할 臨濟便喝1)
1) 본서672則 「德山便棒」과 짝을 이룬다.

[본칙]

임제는 학인이 방장에 들어오는 것을 볼 때마다 할(喝)을 내질렀다.
臨濟, 凡見僧入門, 便喝.

​[설화]​

할에는 네 종류가 있다. 금강왕의 보검과 같은 할, 바닥에 웅크린 사자와 같은 할, 물고기를 유인하는 도구와 같은 할, 할로서의 작용을 하지 않는 할이 그것이다.2) ‘학인이 방장에 들어오는 것을 볼 때마다 내지른 할’도 이 네 종류의 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때는 금강왕의 보검과 같이 활용하고,3) 어떤 때는 바닥에 웅크린 사자와 같이 활용하며,4) 어떤 때는 물고기를 유인하는 도구와 같이 활용한다.5) 비록 이렇다고는 하지만, 그 하나하나의 할이 할로서의 작용을 하지 않는 할6)이다. 또한 세 가지 할 이외에 별도로 할로서의 작용을 하지 않는 하나의 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사할은 모두 근기에 따라 차별되게 시설되지만, 위음왕불7) 저편에 하나의 할이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것이 할로서의 작용을 하지 않는 하나의 할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허황되고 실제와 먼 이치를 추구한 결과 본래의 뜻을 얻지 못한 것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는 “덕산은 방장에 들어오자마자 방을 휘둘렀고 임제는 방장에 들어오자마자 할을 내질렀는데, 제방의 선사들은 이를 두고 ‘정면에서 들어 보이고, 가장 빠른 길로 전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무엇보다 진흙탕으로 달려 들어가 물까지 뒤집어쓰는 방법이다’8)라고 말한다. 설령 하나의 방과 하나의 할에서 온몸으로 본분을 짊어졌다 하더라도 장부답지 못한 사람이다”9)라고 하였다. 대혜의 이 말은 중근기를 위한 발언이며 대혜의 근본적인 뜻은 아니다.
喝有四種, 金剛王寶劒, 踞地師子, 探竿影草, 一喝不作一喝用也. 見僧入門便喝者, 不過此四種. 有時, 用得金剛王寶劒;
有時, 用得踞地師子;有時, 用得探竿影草. 雖然如是, 一一是一喝不作一喝用也. 又非三喝外, 別有一箇喝不作一喝用也. 
或有道, “四喝, 皆是隨機施設, 須知有直在威音那畔地一喝. 此爲一喝不作一喝用.” 這般說話, 騖於虛遠, 非得意者也. 
大慧云, “德山入門便棒, 臨濟入門便喝, 諸方喚作, 劈面提持, 直截分付. 妙喜喚作, 第一等拖泥滯10)水. 直饒向一棒一喝下,

全身荷擔已,11) 是不丈夫漢也.” 大慧此言, 爲中根發, 非大慧本意也.
2)『臨濟語錄』大47 p.504a26에나오며,임제사할(臨濟四喝)이라한다.
3) 모든 의미의 집착을 절단하는 수단으로서의 할. “금강보검이란 그 예리한 칼날과 대적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만일 발을 묶고 손을 동여맨 넝쿨이 길게 늘어져 분별에 얽매인 견해를 버리지 못하는 학인을 만날 경우 바로 
   그 자리에서 절단하여 더 이상 달라붙을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사유분별에 젖어 들면 이 
   칼에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五家宗旨纂要』권상卍114 p.513a13. 金剛寶劍者, 言其快利難當. 
   若遇學人, 纏脚縛手, 葛藤延蔓, 情見不忘, 便與當頭截斷,不容粘搭.若稍涉思惟,未免喪身失命也.)
4) 사자의 포효에 모든 동물들이 달아나듯이 작은 근기와 하찮은 견해를 없애는 할. “바닥에 웅크린 사자는 
   동굴에 살지도 않고, 보금자리에 머물지도 않는다. 위엄 있고 웅장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 조금도 
   의지하는 것이 없다. 으르렁거리며 한번 포효하면 뭇 짐승들의 머리가 갈가리 찢어진다. 밀치고 들어갈 
   빈틈이 없고, 달아날 여지도 없다. 조금이라도 그 앞을 침범하면 이빨과 발톱에 걸려들 것이니 마치 코끼리가 
   물결을 가르면서 달리면 대적할 상대가 없는 것과 같다.”(위의 책 p.513b2. 踞地獅子者, 不居窟穴, 不立窠臼. 
   威雄蹲踞, 毫無依倚. 一聲哮吼, 羣獸腦裂. 無你挨拶處, 無你廻避處. 稍犯當頭, 便落牙爪, 如香象奔波, 
   無有當者.)
5) 종사가 학인을 점검하며 살피는 수단으로 쓰는 할. “물고기를 유인하는 수단(탐간과 영초)이란 하나의 할 중에 
   두 가지 작용을 갖춘 것이다. 살핀다는 것은 학인의 견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점검하는 것으로서 마치 막대기로 
   물의 깊이를 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재는 막대기인 탐간이 손안에 있다’고 한다. 곧 이 하나의 할은 헤아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본뜰 만한 것도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별도로 갈 수 있는 길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미 자취를 숨기고 종적을 감추어 거짓으로 도둑 행세를 하므로 ‘영초를 항상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한다.”
   (위의 책 p.513b10. 探竿影草者, 就一喝之中, 具有二用. 探則勘驗學人見地若何, 如以竿探水之深淺. 故曰, 
   探竿在手. 卽此一喝, 不容窺測, 無可摹擬, 不待別行一路. 已自隱跡迷踪,欺瞞做賊.故曰,影草隨身.)
6) 일정한 형식의 할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형식의 할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는 할. 
   “할로서의 작용을 하지 않는 할이라는 말은 천 가지 만 가지로 변화하지만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금강왕의 보검이라 해도되고, 바닥에 웅크린 사자라 해도 되며, 물고기를 유인하는 수단이라 해도 된다. 마치 
   신령한 용이 출몰하며 자신의 모습을 펼치고 거두는 것이 범상한 현상과 달라서 앞에서 맞이하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를 따르려 해도 그 꼬리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부처와 조사일지라도 보기 어렵고, 
   귀신도 엿보지 못한다. 생각은 비록 하나의 할 속에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할을 벗어난 것이다. 이 네가지 
   할중에서 가장 깊고 미묘한 뜻을 가진 것이다.‘어떤때’라고 한 말을 잘 살펴야 한다. 이것은 매우 활발한 
   뜻이 있어 한결같이 이와같은 작용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다’고 한 말도 잘 살펴야 
   한다. 비슷하여 이와 같다고 한 것에 불과하지만 진실로 이와 같은 명목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뜻 속에서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임제가 제시한 할의 작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위의 책 
   p.513b18. 一喝不作一喝用者, 千變萬化, 無有端倪. 喚作金剛寶劍亦得, 喚作踞地獅子亦得, 
   喚作探竿影草亦得. 如神龍出沒, 舒卷異常,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尾. 佛祖難窺, 鬼神莫覰. 
   意雖在一喝之中, 而實出一喝之外. 此四喝中之最玄最妙者. 須看有時二字, 甚是活潑, 非一向如此用也. 
   又看如之一字, 不過彷彿如此, 非眞有如此名目也. 向者裏轉得身來, 方見臨濟老人用處.)
7) 威音王佛. Bhīsma-garjitasvara-rāja. 과거 장엄겁(莊嚴劫) 이전 공겁 때의 ‘최초의’ 부처님.『法華經』 권6
   「常不輕菩薩品」참조. 선종에서는 위음왕불보다 이전의 시기[威音王佛已前] 또는 여기서와 같이 위음왕불 
   저편[威音那邊]이라는 말로써 어떤 조짐도 나타나기 이전의 경계를 나타낸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또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8) 타니대수(拖泥帶水). 임제의 할은 무엇보다 자세하게 베푸는 방편이었다는 뜻이다. 위에서 가장 빠른 
   길[直截]로 전했다는 뜻은 방편의 매개 없이 곧바로 본질을 보여 주었다는 말이므로 대칭된다.
9)『大慧語錄』권20「示無相居士」大47 p.894b11의 인용이다.
10) ‘滯’는‘帶’의오식이다.
11)『大慧語錄』에따르면,‘已’앞에‘得’이 탈락되었고 ‘荷擔’은‘擔荷’의 도치이다.

대홍보은(大洪報恩)의 송

방장으로 들어오자마자 내지르는 할도,
이미 애절하게 많은 말을 해버린 것인데,
제멋대로 꾸며대는 무수한 선사들이,
또다시 남김없이 끌어 모아 말하는구나.12)
〈돌!〉13)
大洪恩頌, “入門來便喝, 已是大忉怛, 無限杜禪和, 更復論該括.”〈咄!〉
12) 이런저런 논리와 이치를 빌려와할에대하여설명하는어리석음.
13) 咄. 이것은 염송의 편집자가 주의를 촉구하기 위하여 삽입한 한마디의 할과 같은 소리이다. 아래 
    정자본(淨慈本)의 게송 끝에 달린 ‘돌’도 같은 기능이다.

​[설화]

잘못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大洪意, 漏逗不少.

정엄수수(淨嚴守遂)의 송

칼 한 번 휘둘러 전쟁을 평정했으나,
무엇에 의지해 주인과 손님 가려낼까?14)
높은 산 올라 일제히 공물 바쳤으나,
누가 성스럽고 현명한 임금 알아볼까?
淨嚴遂頌, “一釰定煙塵, 憑何辨主賓? 梯山齊入貢, 誰識聖明君?”
14) 할을 하는 주체의 역할과 그 할로 질책받거나 점검받는 등의 역할을 분별하기 어렵다는 말. “하나의 할에 
    손님과 주인이 나누어진다는 말은 하나의 할에 저절로 손님도 있고 주인도 있다는 뜻이다.”(『人天眼目』 
    권2 大48 p.311b24. 一喝分賓主者,一喝中,自有賓有主也.)

[설화]

다만 엿볼 수 없을 뿐이라는 뜻이다.
淨嚴:直是窺覰不得.

정자본의 송

​훌륭하구나, 임제의 할이여!
봄날 울리는 천둥15)과 같도다.
초목이 모두 자라나 번성하니,
교룡16) 조차 이를 막지 못하네.
어긋나면 깨달음에서 미혹되고,
들어맞으면 죽음에서 살아나리.
자벌레와 못에 사는 개구리가,
어찌 바다 드넓은 줄 알리오!
〈돌!〉
淨慈本頌, “偉哉臨濟喝! 狀似春雷發. 草木盡滋榮, 蛟龍難止遏. 差之悟裏迷, 的也死中活. 尺蠖與池蛙, 豈知滄海闊!”
〈咄!〉
15) 봄의 천둥은 땅을 흔들어 겨울잠 자는 생물을 깨우고 만물을 생동시킨다고 한다. 임제의 할이 어리석음에 
    떨어진 자들을 흔들어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한다는 비유로 쓰였다. 장령수탁(長靈守卓)의 게송에 이와 
    일치하는 구절이 있다. “어떤 때의 할은 봄의 천둥이 울리듯 내지르니, 살아 있는 뱀이 활발한 용으로 
    변화하도록 몰아붙일 줄 아노라.”(『禪宗雜毒海』권1 卍114 p.118b15. 有時一喝春雷動,解逼生蛇化活龍.)
16) 蛟龍. 깊은 물에 살며 물과 비를 관장하는 전설상의 두 동물. ‘교’는 홍수를 일으키고, ‘용’은 구름과 비를 
    일으킨다고 한다.

​[설화]

​앞의 두 게송의 뜻을 아울렀다.
淨慈:兼前二意也.

​대혜종고(大慧宗杲)의 송

​문 들어서자마자 내지른 할,
포착할 실마리 전혀 없거늘,
후손들을 끌어들여,
죽반기나 희롱하게 만드네.17)
徑山杲頌, “入門便喝, 全無巴鼻, 引得兒孫, 弄粥飯氣.”
17) 죽반기(粥飯氣)는 죽과 밥을 먹고 얻은 기운을 말하는데, 이는 진실을 깨우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임제의 
    할에는 분별로 포착할 단서가 전혀 없음에도 이를 오해한 후손들이 육신의 남은 기운으로 허망하게 
    헤아린다는 뜻이다.

죽암사규(竹庵士珪)의 송

한 번 내지른 할로 사선천18)에 올랐으나,
임제는 원래 선의 세계 이해하지 못했다네.
아침 햇살 창 밖에서 들어오는 줄 다들 알면서,
밤의 달빛 섬돌 앞에 쏟아지는 줄은 모르네.
竹庵珪頌, “一喝喝上四禪天, 臨濟元來不會禪. 盡道朝陽生戶外, 不知夜月落堦前.”
18) 四禪天. Caturdhyānabhūmi. 사선정(四禪定)을 닦아서 그 과보로 얻는 색계천(色界天).

개암붕의 송

​한 번의 할에 산 무너지고 바닷물 마르니,19)
속박 벗은 온전한 기틀에 본받을 법도 사라졌네.
진흙 소가 하늘 밖으로 높이 솟구쳐 벗어나더니,
아름다운 명성 온 거리에 가득 퍼지게 되었도다.
介庵朋頌, “一喝山崩海水枯, 全機脫略沒䂓模. 泥牛逬出煙霄外, 直得嘉聲滿道途.”
19) 견고하고 타성적인 관념의 세계를 제거한 것.

무진거사의 송

단단히 닫혀버린 동굴 얼어붙어 열리지 않는데,
허공에서 문득 외마디 천둥소리 크게 치자,
낱낱의 교룡은 구름과 안개를 끌고 가고,
지렁이는 제각각 흙과 티끌 파먹고 있네.
無盡居士頌, “蟄戶幽扃凍不開, 虛空忽震一聲雷. 蛟龍一一拏雲霧, 蚯蚓頭頭食土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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