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9칙 운거승가 雲居僧家
[본칙]
운거에게 어떤 학인이 물었다. “승가(僧家)의 궁극적인 경지는 어떤 것입니까?” “산에 사니 좋구나.” 그 학인이 절을 올렸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출가한 사람은 선·악과 역·순 그리고 생·사 등의 경계에서 마치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운거가 한 대 때리고 말했다. “앞서 간 성인들의 가르침을 등질 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을 망치는 견해이다.” 운거가 다시 옆에 있던 학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눈에는 하늘이나 땅의 빛깔이 보이지 않고, 귀에는 거문고나 피리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운거가 또 때리고 말했다. “앞서 간 성인들의 가르침을 등질 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을 망치는 견해이다.”
雲居因僧問, “僧家畢竟如何?” 師云, “居山好.” 僧便作禮. 師云, “汝作麽生會?” 僧云, “出家人, 於善惡逆順生死境界,
如山之不動.” 師便打云, “辜負先聖, 喪我兒孫.” 師復問傍僧, “你作麽生會?” 僧云, “眼不見玄黃之色, 耳不聞絲竹之聲.”
師又打云, “辜負先聖, 喪我兒孫.”
[설화]
승가:산에 있는 집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유가(儒家)나 도가(道家)와 같은 말이다.1)
궁극적인 경지:근본 법도를 나타내는 본분사.
산에 사니 좋구나:아무 맛도 없는 말2)인가? 마치 ‘산을 좋아한다’거나 ‘물을 좋아한다’거나 ‘등롱을 좋아한다’라는 말과 같다. 이것은 영양이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숨는 것과 같은 구절3)이니, 이 말이 아무 맛도 없는 말이라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4) 그런 다음에야 영양이 뿔을 나무 가지에 걸고 숨는 말이 될 것이다.
출가한 사람은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한 말:모든 차별 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산과 같이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학인은 별도로 본분의 소식에 통하여 알면 운거의 의중과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눈에는 ~ 들리지 않습니다:마치 거북이 여섯 부분5)을 껍질에 감추어 보거나 듣는 감각을 모두 끊는 것과 같다.6) 그 학인은 앞의 학인이 잘못 대답하여 매를 맞았으므로 만약 이렇게 말하면 운거의 의중과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운거가 그들을 일일이 모두 때린 이유는 모두 자신의 의중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거의 의중을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僧家者, 非謂山家也. 如儒家道家也. 畢竟者, 極則事也. 居山好者, 無味之談耶? 如好山, 好水, 好燈籠也.
此是羚羊掛角地言句, 不可强判此語爲無味之談. 然後, 爲羚羊掛角也. 出家人至不動者, 於一切差別中, 如山不動.
這僧謂別通消息會, 契得和尙意也. 眼不見至之聲者, 如龜藏六, 杜絶見聞也. 這僧謂彼僧旣被打, 若也如此道得,
契得和上意也. 一一打者, 皆不契和上意故也. 和尙意作麽生會?
1) 여기서‘家’는학파나종파또는사상과뜻을공유하는무리를나타낸다.
2) 무미지담(無味之談). 어떤 의미(맛)가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어떤 개념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이야기. 보통
화두를 수식하는 말로 쓰인다. 동산수초(洞山守初)의 게송에 나오는 말이다. “무미지담:동산수초의 지통기송
(指通機頌)에서 읊었다. ‘동산은 쓸쓸하게 텅 비어 어떤 것 하나도 붙어 살 수 없다네. 맛없는 이야기로 남들의
입을 틀어막을 뿐이노라.’”(『祖庭事苑』 권2 卍113 p.52a11. 無味之談:洞山初, 指通機頌云, ‘洞山寥索,
一無可有. 無味之談, 塞斷人口.’) 설두중현(雪竇重玄)의 게송(『碧巖錄』58則 大48 p.191c5)에도 나온다.
3) 영양괘각(羚羊掛角). 자취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구절을 나타낸다. ‘무미지담’과 마찬가지로 선어(禪語)의
본질적 속성을 보여주는 비유이다.『景德傳燈錄』권17 大51 p.335b7에 따르면, 이 공안의 주인공 운거는 마치
사냥개가 발자취나 냄새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 영양을 추적할 수 있지만 영양이 뿔을 걸고 나무 위에 숨으면
더 이상 찾을 수 없듯이 모색할 자취를 남기지 않은 언어에 대해서는 분별할 여지가 없다는 뜻을 제시했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문답으로 연결된다.“학인이 물었다. ‘영양이 뿔을 걸고 숨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6 곱하기 6은 36이니라.’ 운거가 다시 말했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자취가 없다는 말도 모르는가!’”
(僧問, ‘羚羊掛角時, 如何?’ 師曰, ‘六六三十六.’ 又曰, ‘會麽?’ 僧曰, ‘不會.’ 師曰, ‘不見道, 無蹤迹!’);그보다
앞서 설봉의존(雪峰義存)이 이 비유를 사용했다. “내가 만약 이런 말 저런 말로 표현한다면 그대들은 그
말에서 찾고 그 구절을 좇으며뜻을찾겠지만, 내가 영양이 뿔을 나무 위에 걸어놓고 몸을 숨기듯이 한다면
그대들은 어디서 더듬고 찾겠는가?”(『景德傳燈錄』 권16「雪峰義存傳」大51 p.328b6. 我若東道西道,
汝則尋言逐句;我若羚羊掛角,汝向什麽處捫摸?)
4) 사실은 두 가지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다만 ‘맛이 없는 이야기’라는 구절을 경직된 관념으로 굳혀 또
하나의 보금자리로 만들까 우려한 끝에 ‘영양괘각’의 비유로 다시한번 그 자취를 없애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다.
5) 머리와 꼬리와 네발. 여섯가지 인식기관[六根]을 비유한다.
6) 감각기관을 통제하여 밖의 대상 경계로 인해 시달리지 않는 것.『長阿含經』권8「散陀那經」大1 p.47b17,
『雜阿含經』 권22 大2 p.160c7 등에 나오는 비유. 『出曜經』권23 大4 p.730c8에는 거북이 적으로부터
사지와 머리와 꼬리를 보호하듯이 비구가 생각[意想]을 거두어야[攝] 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거북이
여섯 부분을 감추는 것과 같다. <거북에게는 머리와 꼬리 그리고 네 다리가 있는데, 그것을 여섯 부분이라
한다. 만약 밖에서 적이 침범하여 괴롭히면 그것들을 껍데기 속으로 숨긴다. 중생의 6근이 밖의 대상
경계를 따라다니면 6진(塵)이라는 도적이 침범해 들어오므로 스스로 6근의 문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마치
거북이 여섯 부분을 감추는 것과 같다.>”(『一切經音義』 권26 大54 p.465c3. 如龜藏六<龜有頭尾四足,
名爲六處. 若侵惱則藏入殼中. 衆生六根, 馳流外境, 塵賊來侵, 自守根門, 如龜藏六也.>);『維摩經略疏』
권4 大38 p.611a1 등에서도 이와 동일한 맥락의 뜻으로 풀고 있다.
투자의청(投子義靑)의 송
험하게 솟구치고 만 길 너비로 가로막으니,
사방 천지에 길이 없어 오고 가지 못하네.
옛날부터 해와 달의 빛도 이르지 못했던 곳,
깊은 밤 왕노인이 서쪽 봉우리로 들어간다.7)
投子靑頌, “䃐矹嵯峨萬仞橫, 四邊無路不通行. 自古兩輪光不到, 夜深王老入西岑.”
7) 인식의 빛으로 밝히지 못하는 경계가 왕노인(운거)의 거처라는 뜻.
[설화]
험하게 솟구치고 ~ 오고 가지 못하네:청산 너머 저편의 소식8)이다. 주인 중의 주인의 지위9)이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 이르지 못했던 곳:편위(偏位)나 정위(正位)로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이다.9)
깊은 밤 ~ 들어간다:‘산에 사니 좋구나’라는 한 구절에 해당한다.
投子云云, 不通行者, 靑山那畔. 主中主位故也. 自古云云者, 偏正不到處也. 夜深云云者, 居山好之一句也.
8) 청산나반(靑山那畔). 위음나반(威音那畔) 등과 같은 맥락으로 그곳의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기존의 수단이
모두 폐기된 상황을 나타낸다.
9) 임제(臨濟) 사빈주(四賓主) 중 하나. 손님과 교섭이 완전히 끊어진 경계로서 손님에게 전할 모든 방편을
끊고 오로지 주인 자신이 체득한 경지에 머무르는 방식을 나타낸다.
백운지병(白雲知昺)의 송
승가의 궁극적 경지 묻자 산에 살아 좋다 하니,
나뭇가지에 뿔 걸고 숨은 영양은 어디서 찾을까?
나그네여, 갈림길에서 길 찾기 어렵다 하지 마라.
눈앞에 장안으로 곧바로 통하는 길이 있느니라.10)
만 리까지 펼쳐진 평평한 밭에 한 치 풀도 없는데,11)
소리 찾고 자취 쫓는 사람들 삼실과 같이 많으니,
결국 그들 모두가 운거스님의 속뜻 등져버렸도다.
白雲昺頌, “僧家畢竟居山好, 掛角羚羊何處討? 行人休說路岐難. 目前便是長安道. 萬里平田無寸草, 尋聲逐迹數如麻,
到頭辜負雲居老.”
10) ‘산에 사니 좋다’라는 말에 분별할 자취가 남아 있지 않더라도 바로 그 말에 해법이 있기도 하다는 뜻이다.
11) 만리무촌초(萬里無寸草). 운거가 제기한 자취 없는 말. 동산양개(洞山良价)의 화두를 활용했다.
『禪門拈頌說話』 687則 본칙참조.
황룡혜남(黃龍慧南)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어떻게 한 구절을 말해야 앞서 간 성인들의 가르침을 등지지 않고, 우리 후손들을 망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일 누군가가 제대로 말한다면 곳곳에 솟은 모든 청산이 그에게 도량(道場) 아닌 곳이 없겠지만, 만일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면 흐르는 세월이 그대의 수명을 재촉할 것이며, 못된 귀신이 그대의 행복을 시기할 것이다.” 불자로 선상을 쳤다.
黃龍南, 上堂, 擧此話云, “且作麽生道得一句, 不辜負先聖, 不喪兒孫? 若人道得, 到處靑山, 無非道場;若道不得,
有寒暑兮促君壽, 有鬼神兮妬君福.” 以拂子, 擊禪床.
[설화]
곳곳에 솟은 모든 청산이 그에게 도량 아닌 곳이 없겠지만:앞에서 백운병이 ‘만리까지 펼쳐진 평평한 밭에 한 치 풀도 없다’라고 한 말과 그 뜻이 같다.
흐르는 세월이 ~ 시기할 것이다:만일 한 치의 풀이라도 남아 있다면 세월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黃龍:到處靑山云云者, 前頭萬里平田無寸草, 意同也. 有寒暑兮云云者, 若也有寸草, 則亦不免寒暑也.
고목법성(枯木法成)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여러분! 옛사람은 이와 같이 간단하고 쉽게 보여주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이다지도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구나. 홍각12)이 학인들에게 가르쳐 준 경계를 알겠는가? 만일 모르겠다면 나의 게송을 들어보라. ‘보고 듣는 사물마다 번뇌의 티끌과 먼지인데, 몸과 마음이 재같이 식은 것 부끄러워하노라. 문 닫고 굳이 세간 사람 막을 필요 없지만, 이곳에 과연 몇 사람이나 들어올 수 있을까?’” 〈참!〉
枯木成, 上堂, 擧此話云, “諸仁者! 古人得與麽簡易, 今人得與麽艱難. 還知弘覺爲人處麽? 若不知, 香山有頌,
‘見聞物物盡塵埃, 慚愧身心冷似灰. 閉戶不須防俗客, 此中能有幾人來?’” 〈參!〉
12) 弘覺.운거도응의 시호(諡號).
[설화]
간단하고 쉽게 보여주었다:골수에까지 사무친다는 뜻이다.
어려움을 겪는다:무(無)에 집착하거나 유(有)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보고 듣는 ~ 먼지인데:‘산에 사니 좋다’라는 뜻이다.
재같이 식었다:모든 시끄러운 말다툼에서 벗어났다.
문 닫고 ~ 막을 필요 없지만:오고 가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枯木:簡易者, 徹骨徹髓也. 艱難者, 著無著有也. 見聞云云者, 居山好之義也. 冷似灰者, 離諸喧諍也. 閉戶不須云云者,
不礙往來也.
천동정각(天童正覺)의 소참13)
13) 운거가‘산에사니좋다’라고 한 말에 대한 평석이 중심이 된다.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산은 변하지 않는 본체이니 검푸른 저곳으로 가리라’고 하지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구름이 한 겹 또 한 겹 덮여 있으니 바로 지금 여기가 깨닫기에 결정적인 시기이다’라고 하지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만일 ‘산에 사니 좋다’라는 바로 이 말뜻을 이해한다면 안 될 곳이 어디 있겠는가? 상황에 적절히 응하여 마주치고 질문에 따라 그에 적합하게 응답한 것이니, 이 어찌 딱들어맞게 본분과 상응하는 경지가 아니겠는가! 그대가 만약 모조리 이해했다고 생각하거나 모두 떠맡았다고 여기거나 부처의 경지라고 생각하거나 법이라고 여긴다면, 그 본래의 의중과 상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는 그가 평상시 그렇게 마음을 썼기 때문이니 만일 진실한 납승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이 말을 인정할 것이요,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또한 천리만리의 거리로 멀어질 것이다.”
天童覺, 小參, 擧此話云, “有底道, ‘山是不變之體, 靑靑黯黯處去.’ 有什麽交涉? 有底道, ‘白雲一重又一重, 个是裏許時節.’
有什麽交涉? 若會得者居山好, 有什麽不得處? 應機而對, 隨問而酬, 豈不是恰恰相應底! 你若作承當, 作擔荷, 作佛作法,
便見不相應. 是他平常伊麽用, 若是眞實衲僧, 點頭相許, 若不伊麽, 又成千里萬里去也.”
[설화]
산은 변하지 않는 본체이니 검푸른 저곳으로 가리라:단지 그 본체만 알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글의 뜻을 착각하여 본체만을 안 것에 그치지 않는다.14)
구름이 한 겹 ~ 깨닫기에 결정적인 시기이다:다시 한 번 높은 차원에서 한마디 한 것이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이는 천동이 그 견해를 꺾어서 부정한 말이다.
상황에 적절히 응하여 마주치고 ~ 멀어질 것이다:평상시에 이렇게 마음을 쓴다. 그러나 운거의 의중은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天童:山是不變云云者, 只得其體也. 然則非唯錯認文義, 只得其體也. 白雲一重云云者, 更高一著也. 有什麽交涉者,
此師折拶也. 應機而對云云者, 是尋常伊麽用也. 雲居意不在此限也.
14) 본체만 얻었다는 말은 핵심에서 멀어졌다는 뜻이다.
자수회심(慈受懷深)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도인이 지나간 곳은 마치 불이 얼음을 녹인 것처럼 어떤 자취도 없지만, 새도 날아서 넘긴 어려울 만큼 깊고 험한 길에서도 몸을 돌려 빠져나갈 길이 있다.15) 그 학인이 만약 본분을 깨달은 자16)라면 운거로부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자마자 다만 ‘화상께서 칼로 초목을 베고 난 뒤 밭을 일구면 저는 불을 지른 다음 씨를 뿌리고,17) 화상께서 차를 끓이면 저는 마당을 쓸겠습니다’라고 응답했을 것이다. 만약 이렇게 결정적인 전기가 되는 한마디를 했다면, 설령 홍각노자의 문턱이 바다와 같이 깊고 그 도가 산과 같이 무거워 어떤 소리와 색이나 어떤 형용조차 침범할 수 없다18)고 해도 틀림없이 얼굴 가득 미소 짓게 했을 것이다.”
慈受, 上堂, 擧此話云, “道人行處, 如火消冰, 鳥道玄途, 轉身有路. 者僧若是个漢, 才見他道, ‘你作麽生會?’ 但云,
‘和尙刀耕, 學人火種;和尙煎茶, 學人掃地.’ 若下者一轉語, 直饒弘覺老子, 門深似海, 道重如山, 聲色形容, 不可干犯,
也須敎滿面是笑.”
15) 운거는 마치 새가 날아간 허공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처럼 부정만 하여 어떤 자취도 없애고 따라갈
길도 사라지게 만들었지만, 그곳에서도 살아나갈 방도가 있다는 말.
16) 개한(个漢). 바로 그 사람 또는 바로 이 사람이라는 말로서, 대단한 인물로 지목할 만한 사람을 가리킨다.
개한(箇漢)이라고도 쓴다.
17) 도경화종(刀耕火種). 화전(火田)과 같은 경작법. “깊은 산이나 으슥한 계곡에서는 도경화종의 경작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먼저 초목을 베어 산속의 밭 터를 확보하였으니, 비록 깎아지른 낭떠러지나 험한 봉우리라
할지라도 나무를 남김없이 쓰러뜨린 다음 그것들이 마르고 건조해질 때를 기다려 불을 놓는다. 불이
치열하게 타고나면 그곳에 씨를 뿌린다.”(宋 王禹偁의『佘田詞』 「序文」.皆深山窮谷, 其民刀耕火種.
大抵先斫山田, 雖懸崖絶嶺, 樹木盡仆, 俟其乾且燥, 乃行火焉. 火尙熾, 卽以種播之.)
18) 이 또한 소리·빛·형용등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을 나타낸다.
[설화]
마치 불이 얼음을 녹인 것처럼:장애가 되는 한 점의 지견(知見)도 없다. 이처럼 새가 날아간 까마득한 길을 마주하더라도 몸을 돌려 빠져나갈 길이 있다는 뜻이다.
한 사람은 칼로 초목을 베고 난 뒤 밭을 일구면 다른 한 사람은 불을 지른 다음 씨를 뿌리고, 한 사람이 차를 끓이면 다른 한 사람은 마당을 쓴다:북을 치고 노래하는 것을 함께 행한다.19) 이처럼 홍각의 의중을 잘 알고 대응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지는 것이다.
慈受:如火消氷者, 無一點知見爲礙. 然則當鳥道玄路, 有轉身處也. 一人刀耕, 一人火種, 一煎茶一掃地云云者,
敲唱俱行也. 然則通對洪20) 覺意也. 故滿面是笑也.
19) 북의 박자와 노래의 가락이 어울리듯이 서로 상대의 생각을 알아차려 조화롭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20) ‘洪’은‘弘’자의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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