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공안집 II

1122칙 경청줄탁 鏡淸啐啄

실론섬 2026. 4. 22. 17:27

1122칙 경청줄탁 鏡淸啐啄1)

​[본칙]

경청에게 어떤 학인이 물었다. “제가 안에서 쫄 터이니 스님께서는 밖에서 쪼아 깨뜨려주십시오.” “살아나올 수 있겠는가?” “살아나오지 못한다면 남들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번뇌의 풀숲에 떨어져 있는 형편없는 놈이로구나.”  
鏡淸因僧問, “學人啐, 請師啄.” 師云, “還得活也無?” 僧云, “若不活, 遭人怪笑.” 師云, “也是草裏漢.”
1) 경청도부(鏡淸道怤 864~937)와 한 학인이 선(禪)의 개오(開悟)를 알 속에서 새끼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모양에 비유하며 나눈 문답.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줄(啐), 어미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알을 깰때에 이 두 가지가 안과 밖에서 동시에 호응해야 하듯이 수행자의 개오
   (開悟)와 스승의 지도 관계도 그러해야 함을 이에 비유한 말이다. 학인은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서 
   경청에게 초리한(草裏漢)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풀숲에서 헤매는 멍청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제자의 
   ‘줄’과 스승의 ‘탁’이 계합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로서 학인에게 더욱더 분발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설화]

‘줄탁’이란 옛말에 ‘새끼는 껍질 안에서 쪼고 어미는 밖에서 쫀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그 학인은 스스로 ‘경청과 인연에 응하여도 아무 잘못 없이 맞닥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살아나올 수 있겠는가:경청이 쪼기를 마쳤기 때문에 한 말이다.
살아나오지 못한다면 남들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학인 자신도 쪼기를 마쳤다고 생각하고 한 말이다.
번뇌의 풀숲에 떨어져 있는 형편없는 놈이로구나:안과 밖에서 동시에 쪼는 눈만 갖추었을 뿐, 안과 밖에서 동시에 쪼는 작용이 없다는 말이니,2) 이것이 바로 풀숲으로 마구 내달렸다는 뜻이다.  
啐啄者, 古云, 子啐母啄云云. 這僧自謂, 與鏡淸應緣, 不錯相見也. 還得活也無者, 所以啄了也. 若不活云云者, 自謂已啐也.

也是草裏漢者, 只知3)啐啄同時眼, 而無啐啄同時用也, 是草裏走殺也.
2) 『圜悟語錄』권7 大47 p.743c16에 경청과 남원혜옹(南院慧顒 860~930)의 말로 제기되어 있다. 남원의 
   다음 상당법문에도 보인다. “남원이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제방에서는 단지 안과 밖에서 동시에 쪼는 
   안목만 갖추고 있을 뿐 안과 밖에서 동시에 쪼는 작용은 갖추지 못했다.’ 한 학인이 물었다. ‘안과 밖에서 
   동시에 쪼는 작용이란 어떤 것입니까?’ ‘작가는 안과 밖에서 쪼지 않으니, 안에서 쪼는 작용과 밖에서 
   쪼는 작용을 동시에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가 여쭌 내용이 아닙니다.’ ‘그대가 물은 내용은 
   어떤 것인가?’ 학인이 ‘잃어버렸습니다’라고 하자 남원이 때렸다. 그 학인이 이에 수긍하지 않고 뒤에 
   운문 회하에 가 이전의 남원과의 인연을 제기하고 수긍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그때 옆에 있던 학인이 
   ‘당시에 남원의 주장자가 부러졌습니까?’라고 하는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크게 깨쳤다.”
   (『南院語要』 古尊宿語錄7 卍118 p.236a7. 上堂云, ‘諸方只具啐啄同時眼, 不具啐啄同時用.’ 僧問, 
   ‘如何是啐啄同時用?’ 師云, ‘作家不啐啄, 啐啄同時失.’ 僧云, ‘猶是未學人問處.’ 師云, ‘你問處作麽生?’ 
   僧云, ‘失.’ 師便打. 其僧不肯. 後到雲門會裏,擧前因緣,說不肯. 其時有傍僧云, ‘當時南院棒折那?’
   僧聞此語,言下大悟.)
3) ‘知’는‘具’자의오식.

설두중현(雪竇重顯)의 송

​옛 부처에게 가풍이 있었으나,
들어보였다가 반박만 당했다네.
새끼와 어미 서로 알지 못하니,
누가 안팎에서 동시에 쪼리오?
쪼아서 깨어났으나 여전히 껍질 안에 있어,
거듭 부서짐을 받아야 할 것인데,
천하 납승들 헛되이 이름 붙이고 겉모양만 본뜨네.
雪竇顯頌, “古佛有家風, 對揚遭貶剝. 子母不相知, 是誰同啐啄? 啄覺猶在殼, 重遭撲, 天下衲僧徒名邈.”

[설화]

​옛 부처:경청을 가리킨다.
들어보였다가 반박만 당했네:모든 사람이 이 경계에 이르러서는 반박을 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새끼와 어미 서로 알지 못하니:본래부터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다.
쪼아서[啄]:어미가 쪼는 것이다.
깨어났으나[覺]:새끼가 스스로 깨어났다는 것이다.
(쪼아서 깨어났다는 말은) 새끼와 어미가 만났다는 뜻이다.
여전히 껍질 안에 있다면, 단지 안과 밖에서 동시에 쪼는 눈만 갖추었을 뿐이라는 말이다.
거듭 부서짐을 받아야 할 것인데:동시에 쪼는 작용을 가리킨다.
천하 납승들 헛되이 이름 붙이고 겉모양만 본뜨네:이리저리 더듬어서는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雪竇:古佛者, 鏡淸也. 對揚遭貶剝者, 諸人到此, 未免遭貶剝也. 子母不相云云者, 本不曾相見也. 啄者, 母啄也. 
覺者, 自覺也, 子母相見也. 猶在殼則, 只有啐啄同時眼也, 重遭撲者, 同時用也. 天下云云者, 摸 不著也.

설두중현의 염

“납승이 이처럼 기특한 솜씨를 가지고 특출나게 드문 인물4)과 함께 남김없이 펼쳐보였다면, 옛 성인도 부질없이 나타날 일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又拈, “衲僧有此奇特事, 若一人半个互相平展, 古聖也不虛出來一回.”
4) 일인반개(一人半个). 한 사람의 반. 곧 반쪽의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러한 사람은 없으므로 특출나고 보기 
   드문 인물을 나타낸다. 교학에서 반인(半人)이라 하면 인간으로서 악행을 저지르는 등 온전하지 못한 자를 
   가리키고, 상대적으로 선행을 하는 자는 만인(滿人)이라 한다.『大般涅槃經』권8 大12 p.655a20 참조.

[설화]

납승이 이처럼 기특한 솜씨를 가지고:모름지기 이러한 수단이 있어야 비로소 납승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특출나게 드문 인물 ~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학인이 대종사와 같은 수단을 쓸 수 있다면 종사가 부질없이 나타나 가르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又拈:衲僧有此云云者, 大抵有此手段, 方名衲僧也. 若一人云云者, 學人如大宗師手段, 則宗師不虛出來也.

법진수일(法眞守一)의 염

“그 학인이 살아났다면 경청이 어째서 번뇌의 풀숲에 떨어진 놈이라 하였겠는가? 사방을 고루 아는 안목으로 살피지 않았다면 그 학인도 함께 굴욕을 당했을 것이다. 알겠는가? 큰 그릇을 원만히 이루고자 한다면 반드시 뛰어난 대장장이[作家]의 풀무질이라야 한다.5)”  
法眞一拈, “者僧, 旣是得活, 鏡淸, 因什麽道也是草裏漢? 若無知方眼鑑, 者僧還同受屈. 要會麽? 欲令大器圓成, 
須是作家爐鞴.”
5) 노비(爐鞴)에서 ‘노’는 대장간의 화로, ‘비’는 풀무질하는 통을 가리킨다. 구리나 쇠 등을 단련하기 위한 화로 
   또는 풀무질을 말한다. 종사(宗師)가 학인을 도야(陶冶)하는 수단을 비유한다. 뛰어난 대장장이[匠人]의 
   풀무질로 완성도 높은 물건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학인을 단련시켜 깨닫게 만드는 종사를 종장(宗匠) 또는 
   작가(作家)라 한다.

[설화]

​법진수일의 염은 드러난 말에 뜻이 나타난다.
法眞拈云云也.